◈야담=홧김에 서방질◈
홍진사는 천하의 한량이다.
기생집에 들어가면 치마 입은 것들은 홍진사를 서로 차지하려고 버선발로 흙마당에 뛰쳐나온다.
여승도, 양갓집 규수도, 소리꾼도 홍진사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쓴다.
허나 홍진사에게도 생전 처음 난관의 벽이 가로막았다.
이 마을 서당에 새로 부임해 온 젊은 훈장의 처가 자색이 보통이 아니다.
얼굴 예쁘기로만 치면 기생들이 낫지만, 훈장의 처는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얼음처럼 싸늘하고 깐 밤처럼 말끔한데다 매화처럼 이지적이다.
훈장이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칠 동안 훈장의 처는 수묵을 친다.
홍진사는 훈장 처에게 반해 훈장님과 글한다는 핑계로 뻔질나게 서당을 들락거리며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멋모르는 훈장은 친구도 없이 외롭던 차에 좋은 술과 산해진미 안주를
싸 들고 오는 홍진사가 반갑기만 한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엔 훈장과 술잔을 나누던 홍진사가 방구석에 쌓인 훈장 부인이 친
사군자를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와~ 이것은 걸작이요” 하며 펼쳐 들자 “집사람이
심심풀이 삼아 수묵을 친 졸작입니다.
” 훈장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홍진사는 “제게 파십시오” 하며 엽전 주머니를 놓고 한점을
둘둘 말아 품속에 넣었다.
돈 받고 팔 만한 작품이 아니라며 마음에 든다면 그냥 가져가라 해도 막무가내다.
홍진사가 가고 난 후에 훈장 부부는 주머니를 열어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금 백냥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훈장이 학동들을 가르칠 때 훈장 부인이 돈주머니를 돌려주려고 홍진사를 찾아왔다.
홍진사는 끝난 거래라며 돈주머니를 받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다가 훈장 부인의 손목을 잡았다.
하초가 뻐근했지만 참았다.
며칠 후, 밤에 훈장이 당숙모 문상하러 고향에 갔다는 걸 알고,
모른 척 술병과 육회 안주를 들고 서당을 찾은 홍진사가 혼자 있는 훈장 부인의 손목을 잡았다.
홱 손을 뿌리치자 내친 김에 그녀를 안고 쓰러져 옷고름을 풀었다.
그녀는 은장도를 꺼내 들고 자기 목에 칼끝을 겨눈 채 싸늘한 눈초리로 홍진사를 노려봤다.
“알겠소. 알겠소.” 홍진사는 뒷걸음쳐 도망갔다.
다시 며칠 후 학동 편에 서당에 오라는 훈장의 전갈을 받고, 안 가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아
홍진사가 찾아가자 훈장이 반갑게 맞으며 고향에서 가져온 돔배기를 술과 함께 내놓았다.
술상을 들고 온 훈장 부인은 태연하게 홍진사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다.
두 사람이 과하게 술이 오르자 홍진사가 훈장 팔소매를 끌었다.
저잣거리로 가 홍진사의 단골 기생집으로 갔다.
홍진사가 기생어미한테 몰래 엽전 꾸러미를 두둑이 찔러주고 귓속말을 했다.
그날 밤 술자리를 끝내고, 초승달처럼 예쁜 청매가 훈장을 잡아
금침이 깔린 뒷방으로 데려가 온갖 기교를 다 부려 혼을 빼놓았다.
삼일이 멀다 하고 홍진사와 훈장은 기생집을 찾았다. 훈장이 청매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다.
나무토막처럼 반듯하게 누워 숨소리조차 감추는 부인과 달리
청매는 촛불을 켜 놓은 채 홑치마만 입고 그것으로 훈장 얼굴을 덮었다.
어느 날 밤 기생집에서 훈장과 술을 마시던 홍진사가 “여봐라, 훈장님이 혼자 왕림하시더라도
술값은 나에게 달아 놓아라.”
훈장은 혼자서도 자고 갔다. 훈장 부인은 투기를 내색하지 않았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밤,
훈장이 혼자 기생집에 가 청매를 끼고 술을 마실 때 홍진사는 서당에 갔다.
훈장 부인 옷고름을 풀었을 때
그녀는 은장도를 꺼내는 대신 눈을 감았다.
홧김에 서방질을 했다 하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