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자리
황제내경 상고천진론에서 사람다운 사람을 넷으로 분류했다.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진인(眞人), 진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지인(至人), 그리고 시공에 제한을 받는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으로 구분한 것이다. 진인과 지인은 시공을 초월한 사람이므로 그 사람들이 있는 곳이 그 자체가 우주요 또한 혈이 된다. 그러나 성인(聖人)이하의 사람들은 시공의 제한을 받으므로 자연의 변화에 몸과 마음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선족의 사람들은 스스로 진인임을 깨닫기 위한 몸과 마음을 갖추는 곳으로 자연의 기 흐름이 몸과 마음에 가장 효율적인 영향을 주는 장소를 찾았는데 그것을 혈(穴)이라고 한다. 혈이란 구멍을 뜻하는 것인데 구멍이란 여러 형태의 기가 들고 나는 공간이자 동시에 많은 기운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혈이란 주재자가 남면하는 곳이다. 이 수련 터 즉 도장(道場)은 선사상이 도가 불가 유가에 의해 덧칠되고 덧칠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된 이후에도 도가 불가 유가 속에 그 흔적이 남아 내려오게 된다. 예컨대 근세조선의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신선이 되고자 단혈(丹穴)에 머물러 살까”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신선 즉 신이 되고자 하는 선족은 (단)혈이란 곳에 따로 자리했었던 것을 뜻하는 말이다.
자 그러면 혈이란 곳은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곳일까? 구멍이란 뜻에서 분명히 자연의 기가 많이 들고나는 곳이므로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사람도 자연의 기운의 도움을 받아 기 순환이 잘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사람의 이상적인 기순환 상태를 수승화강이라고 하는데 이는 수기(水氣) 즉 하초의 기는 위로 오르고 화기(火氣) 즉 상초의 기는 아래 내려간다는 말이다. 스스로 수승화강이 안되면 외부의 기순환에 도움을 받는 것은 지혜다. 혈 자리 공부가 바로 그런 것이다.
혈에 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고등학교 수준의 물리학을 잠시 들여다보자. 자연 공간에서 하나의 물체는 주위의 물체와 전기 자기 중력 등의 많은 종류의 에너지를 교환한다. 지금 둥근 테두리가 있고 가운데에 고깔처럼 솟아오른 재떨이가 있다고 하자. 단면을 그리면 마치 가운데 획이 높지 않은 山자와 같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재떨이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가 교환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고깔의 정점이 최고이고 그 다음이 둥근 테두리의 날이다. 바로 혈 자리는 가운데 고깔의 정점이 되는 곳이다. 선을 공부하는 자리는 그런 자리인데 그곳을 기가 모이고 흐른다고 해서 혈이라고 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면 오히려 구멍과는 반대의 모습이지만 그러나 옛 조상들은 바로 그곳이 하늘과 땅의 기운이 모여 흐르는 구멍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혈 자리의 모습은 자연 상태에서는 마치 여자의 음핵과 비슷하다. 이와 같은 혈은 명산에서 정성만 있다면 바로 찾을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혈이 수락산에 있다. 당고개역에서 내려 수락산유원지를 지나 도선사를 찾아 그 옆의 냇물을 따라 몇십 걸음 올라가면 좌우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모이는 곳 바로 위에 조그만 바위동산이 있다. 그 바위 윗면이 혈 이다. 그 바위에 올라가 남면해보라. 남면이라 말하니 남쪽을 보라는 뜻이 아니고 양기가 들어오는 하늘이 많은 곳을 보라는 뜻이다. 전면에 멀리 불암산 봉우리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좌청룡 우백호 후현무가 당신을 보위하여 절로 마음과 몸이 편안해짐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편안하게 쉬면서 스스로 우주의 주인이 되어보는 것 자체가 혈 자리를 이용한 선 공부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의 혈 자리를 몰라 명상 공부한다며 다른 나라의 성지(?)를 찾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글이 공개된 이후부터는 등산객이나 관련 관청이든 누구나 그 혈자리에 가서 마음을 다스리고 조상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단장해주기를 바란다. 다른 혈 자리를 더 소개하면 장흥유원지길 대승사 반대편 골짜기로 끝까지 들어가면 8부 능선에 한 종교단체에서 세운 흰 탑이 보인다. 그 흰 탑 자리는 원래 기운이 부드러운 혈 자리였는데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탑을 세워 혈의 원형이 훼손되고 말았다. 그러나 혈이 어떤 곳인지 알기위해 지금이라도 가서 탑앞마당에서 남면해보면 그곳이 혈임이 바로 알 수 있다. 또 도봉산입구에서 망월암 옆길로 오르면 정상 근처에 계단길이 나오는데 그 왼쪽으로 마치 턱이 뾰족한 사람의 얼굴 같은 큰 바위가 있다. 바로 그 바위가 도봉산의 대혈이다. 수년전에 가보았더니 등산객들의 점심터로 변해 여기저기 쓰레기가 너절한 것이 마치 지금의 후손들의 정신 상태를 보는 듯하였다.
흔히 익히 들은 명산의 관광명소는 거의가 혈 자리다. 나옹대 연주대 적멸보궁 무슨무슨 신선암 등이 모두 그러하다. 왜 옛 절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속에 있겠는가? 우리 혼(魂) 속에 새겨진 선의 영향으로 명산 속의 혈 자리를 찾아 그 근처에 절을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찰의 근처에는 거의가 혈이 있다. 윤선도는 도교적 신선세계를 보길도에서 구현시키고자했다. 보길도의 동천 석굴은 필자가 보기에는 전형적인 혈 자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윤선도가 앉아서 선을 했던 곳이다. 힘들게 올라가 햇볕아래 차를 마시고 놀던 곳이 결코 아닌데 후손들이 만든 실없는 구조물이 윤선도를 오히려 우습게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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