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청룡 우백호 / 김붕래
명당을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장풍득수(藏風得水)와 배산임수(背山臨水)입니다. 바람을 피하고 샘이 솟는 명당이기 위해서는, 뒤로는 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앞으로는 강이 흘러 용수가 편리해야 합니다. 천문(天門)은 넓고 지호(地戶)는 좁아야 길지(吉地)라 했습니다. 서울로 흘러드는 한강의 상류(천문- 남동향)는 질펀하고,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지호 - 북서향)는 닫혀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점에서 경복궁은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뒤로는 백악(북악산)이 우뚝하고 낙산과 인왕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끼고 있으니까요. 북악에 올라 남쪽을 조망하면 목멱산(남산)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굽이굽이 한강이 흐릅니다. 가히 젖과 꿀이 흐르는 천년 승지임이 분명합니다. 한양(漢陽)이란 이름은 이 한강의 북쪽(水之北)이란 뜻입니다. 이태조가 이곳에 정도하면서 한성이라 했고, 일제 때는 경성이라 하다가 1945년 서울이란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 그런데 형님 격인 좌청룡, 낙산(駱山)의 왜소함이 풍수지리 입장에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350m에 달하는 북악산, 인왕산과 달리 낙산은 125m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산세도 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도 혜화역 동쪽 대학로 뒷산, 낙산공원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 주변은 모두 택지가 들어서서 산의 본래 모습을 다 잃어버렸지만, ‘수선전도(首善全圖)’ 같은 옛날 지도에 나오는 낙산도 섬처럼 작은 봉우리로 그려져 있습니다. 반면 인왕산은 호랑이가 살만큼 꽤 깊은 산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강감찬 장군이 호랑이를 꾸짖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현재 인왕산 산책로 곳곳에는 서울의 수호신으로 호랑이 모습이 여러 군데 조각되어 있는 것 또한 인왕산이 제법 깊은 산 구실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왕과 낙산 두 산의 모습은 아우가 형을 능가하는 형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장자 계승권이 확실한 조선조에서 큰아들이 임금이 된 분은 7분밖에 없으며 이들도 문종, 인종 같이 단명하거나 단종 같이 불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경복궁을 보호하는 좌우 산의 잘못된 형세를 피하기 위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해서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의견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이 임금은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한다는 성리학적 교리를 주장하면서 북악산이 진산(주산)이 되고 오늘의 경복궁이 탄생했습니다. 그 대신 낙산의 지세가 약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대문의 명칭을 <흥인지문>이라 하여 다른 문보다 한 글자를 더 보태고 문 동쪽으로 타원형의 옹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일설에는 <之>자의 형상이 산이 꿈틀거리며 뻗어나가는 모습이라 낙산의 약한 산세를 보충한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남산의 외산(外山)인 관악산에서 뿜어 나오는 화기를 막기 위해 경복궁 앞에는 해치(해태)를 앉혀 놓고, ‘숭례문’이란 현판도 세로로 세워 달아 화기를 눌러서 도성의 결함을 바로 잡았습니다. 백악 밑에 경복궁이 있다면 경복궁의 연장선 상 동쪽, 응봉(鷹峰-지금의 와룡공원)의 줄기 아래 창덕궁이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동궐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태종은 왕자의 난 같은 골육상쟁을 펼쳤던 경복궁을 피해 창덕궁을 짓고 여기서 정사를 보았습니다. 또한 이 웅봉의 줄기아래 아래 문묘(文廟)가 자리했습니다. 공자님과 해동 18현을 모신 대성전, 퇴계, 율곡이 공부하던 ‘명륜당’도 명당의 기운이 완연합니다. 이 자리가 바로 현재의 성균관대학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시작되면서 영의정(국무총리)과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가 성대에서 배출됐으니 이 또한 명당의 음덕이라 하면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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