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과 풍수

[스크랩] 명당에 줄줄이 인물난다..

발란스건강 2017. 9. 15. 09:44

 

 

 

명당에 줄줄이 인물난다..

 

전남 화순군이 소개하고 있는 우리 능성구가에 대한 한 토막 얘기를 정리해서 올려본다. 참고로 본인은 29세손이다.

 

한천(寒泉)면에는 정리(政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 정리의 정승동(政丞洞)은 현재 23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지만 조선 중엽에는 서슬이 퍼렇던 마을이다. 정승동(政丞洞)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마을 뒷산이 명당으로 정승이 났고 일대가 묘를 섬기기 위한 사폐지(賜牌地)로 지정됐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명당은 능성 구씨(綾城具氏) 2대조인 평장사(平章事) 민첨(民瞻)의 묘소다. 평장사란 고려시대 벼슬로 정이품인데 보통 정동이라고도 했다.

   

능성구씨 등이 발복하여 행세를 한 것은 이조 초기로 정조(正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위세를 떨쳤던 집안이다. 그 가문에서는 5백 62명의 과거급제자를 냈고 이중 65%인 3백63명이 무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왕후가 1명, 공주를 맞아들인 부마가 4명이나 되었으며 영의정급 2명, 종2품 이상을 9명이나 냈다. 이처럼 큰 인물이 많이 난 것은 모두 2대조인 민첨의 묘소가 명당이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위치는 정승동 마을 뒤 1㎞지점 산중턱으로 사진에서 보이듯 경사도가 70도에 이르는 가파른 곳에 있다. 이 묘는 국사봉(國師峰)에서 출발한 산맥이 12마디를 이루어 내려오다 멈춘 현침혈로 사람에 따라 천녀등공혈(天女登空穴)이라고도 하는데 호남 8대명당중 하나로 풍수지리연구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주변의 소나무가 묘를 향해 굽은 모습이 마치 군사들이 장군을 향해 예의를 표하는 모습같다 하여 장군대좌형(將軍臺座形)이라고도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하도 가파르기 때문에 그의 아들 인이 그곳에 그의 아버지를 장사 지내던 날 묘제를 지내려고 밥상을 놓았더니 밥그릇이 1백m 가량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버렸다고 한다. 인이 뛰어 내려가 밥그릇이 머무른 자리에 이르러 보니 밥그릇 선 자리가 이상하게 사람이 판 흔적이 있는 터였으므로 그 땅을 파보았더니 산도둑들이 수백량의 돈을 감춰 놓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묘자리가 명당이라 그 명기(明氣)가 그처럼 즉발했더라는 전설로 인해 더욱 풍수가들이 찾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승동의 민첨 묘소는 중종반정을 일으켰을 때까지도 돌보는 이가 별로 없어 인근 사람들이 그 주위에 암장을 하는 등 형편이 아니었으나 1547년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구수담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내려와 이곳을 찾아온 길에 묘소관리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이곳에 암장한 박영(朴英), 김숙곤(金淑坤) 등을 잡아 가두고 묘소일대를 정화했다.

 

그리고 묘소의 축대를 쌓아올렸는데 계속 무너지자 나주, 남평, 동복, 보성, 장흥고을에서 힘센 장정을 뽑아 백리 밖에서 돌을 옮겨 축성을 하였으며 지나가는 스님 한 사람을 잡아 올려 생매장하였다는 말까지 전한다. 후일에 불길한 액을 면하기 위하여 먼저 지신(地神)에 바쳐 방액을 하자는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과연 그러한 영험인지 지금까지 그 축대가 무너진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정승동에는 구씨 시조 30 ~ 35세손들이 살고 있는데 23호중 20호가 구씨고 나머지 3호는 그 외손들이다. 구씨들은 이 마을입구에 73년 영모제(永慕齊)라는 제각을 짓고 시조 및 그 후손들 제사를 10월 15일부터 10일간 계속하고 있다.

 

 

 

출처 : 우소인~
글쓴이 : 구름위 소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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