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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로 옮긴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은 어느 지사가 보아도 명당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 영릉은 서울의 경복궁처럼 좌향을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으로 잡았으며 좌청룡 우백호는 말할 것도 없고 좌청룡 우백호의 능선이 혈장(血漿)을 감싸고 있다. 이처럼 골짜기에서 생기는 득수(得水)가 흘러 합쳐지면서 외부로 흘러가는 곳을 풍수지리설에서는 파구(破口)라고 한다. 파구가 있어야 국(局)을 이룬다. 영릉은 이 파구 위치에 연못이 있다. 이 연못으로 혈장 양쪽에서 생기는 물이 흘러들게 되어 있다. 혈장(무덤위치)이 양(陽)의 상징이라면 이 연못은 음(陰)의 상징이다. 음양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돌로 쌓아 비단잉어를 기르고 있어 자연의 신비를 인공으로 가감한 셈이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원래 명당에서 얘기가 참 많다. 영릉이 지금의 위치에 자리한 일화도 흥미롭다. 여주 인근의 노인들 얘기에 따르면 원래는 그 자리에 권씨들이 묘 자리를 잡았다. 장지를 정해 준 지사는 장사를 지낼 때 절대로 천막을 치거나 솔을 걸지 말고 산역을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당시 권세가였던 권씨네는 선영의 일을 하면서 인부들을 잘 먹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여름 햇볕을 피하기 위해 천막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햇볕이 쨍쨍 나던 오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세종대앙의 묘 자리를 찾아 헤매던 지관들이 갑자기 비가 오자, 비를 피할 곳을 찾던중 산중에서 연기가 오르고 천막 친 곳이 보여 권씨네 산역장소로 찾아들었다. 이들이 당도해 묘 자리를 보는 순간 자기들이 찾던 명당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앞산 즉 안산의 좌향 위치에 검은 바위가 흉하게 자리하고 있어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때 굵은 빗속에 별안간 천둥번개가 치더니 벼락이 그 바위에 떨어져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신분을 감추었던 지관들은 무릎을 탁 치고 드디어 자리를 찾았다는 듯 가볍게 일어섰다. 물론 권씨네는 쫓겨가고 지금의 영릉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