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의 모습

[스크랩] 청계천변의 그때그시절

발란스건강 2016. 8. 19. 17:16

청계천변의 그때그시절

 

(대한제국시기. 사진위)
천변 호안석축은 잘 쌓여져 있고 군데군데 풀이 무성하다.
석축 위 천변길에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고 있는데,

양반 여인네들이 장옷을 입고 얼굴만 내놓은 채 걷고 있다.
청계천 남쪽을 촬영한 듯 길가 벽에는 창이 보이지 않는다.

(1900년경, ⓒ고종호 '京城名所' 사진엽서) 종로방향에서

 광통교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광통교는 남대문로와 종로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남대문에서 종로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곳은 시전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도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 중의 하나였다.
사진 중앙에는 광통교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 난간석이 잘
보인다.

'천변 빨래터'

 

(1904년, ⓒ서희경)

청계천 상류는 물이 얕고 맑아 빨래를 하려는
주변의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지게꾼'

 

(대한제국시기,
청계천을 따라 나있는 길이 좁은 듯 개천을 보호하기 위한
축대 밑에 과일가게가 있고,
그 옆에 곰방대를 쥐고 있는 중년
남성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지게에 무언가를 담고 가는 지게꾼이 보인다.
수표교 부근은 서울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날품팔이 지게꾼들이 일이 걸릴까
하고 모여들곤 하였다.
당시 시골살림이 어려워 서울로 이사 온 사람들은
남정네는 지게꾼으로
아낙네는 행상으로 나서기가 십상이었다.

'수표와 수표교'

 

(일제강점기,
수표교 남쪽을 바라본 사진이다.
수표교 남편에는 양 길가에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좌측 길모퉁이에 담배를 팔았던
연초煙草(タバコ)가게가 눈에 들어오고,
그 양옆에 약국과 중앙상회지점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탕반, 탁주, 소주 등을
한자와 한글로 쓴 술집 간판이 보인다.

(1950년대말~1960년대초,
어느 한가한날 수표교를 찍은 사진이다.

수표교 난간 위에는 한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데,
사진소장자 본인이라고 한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고,
담뱃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속 수표교에는 난간석 1조가 없는데, 소장자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상처라고 한다.


'청계천 주변천'

 

(대한제국시기, 삼청동천, (朝鮮風俗-井戶ト水汲夫사진엽서))
나무 뒤로 경복궁 건춘문이 가려져 있고,
천변 우물가에 물장수가 물지게를 지고 있다.

(1927년, 금청교,
금청교는 청계천에 처음 놓인 돌다리로 청계천 상류 부근에
체부동과 통의동, 적선동,
내자동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었다.

'판자촌'

 

광복과
한국전쟁 후 서울로 피난온 피난민들은
청계천변을 따라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청계천변 판잣집은 불결과 빈곤의 상징이었다. 

큰 비가 쏟아지면 집을 떠받치고 있던
나무기둥이 불어난 하천에 쓸려가 버렸다.
이로 인해 집 전체가 무너지기도 했다.


한편, 판자촌 거주민들이 버린 생활하수가
그대로 하천으로 배출되어 청계천은 심한
악취가 진동하고 각종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


'염색공장'


 

(1960년대말) 한 아저씨가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대 위에 널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그나마 미군부대 등 군대에서 흘러나온 군용 물자만이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군복을 염색해서 많이 입었다.

당시
청계천변에는 군복을 염색하는 업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방출된 하수는 그대로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 때문에 청계천
하류의 물빛은 언제나 짙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고 한다.

'복개 전 풍경'

 

(1965년,
오간수문 밖 하류 청계 6가 청계천변의 당시 일상 풍경이다.
열 지어 늘어서 있는 콘크리트 기둥 사이에서 뛰놀며 물놀이
하던 아이들은 지친 듯
늘어놓은 콘크리트 파일 위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아이들은 과연 곧 닥쳐올 청계천 판자촌의 운명,
청계천이 복개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평화시장'


 

(1965년,
평화시장은 청계천이 오간수문까지 복개되면서 함께 문을 열었다.
시장 이름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피난민들이 세웠기
때문에 평화를 기리는 실향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이 시장은 1960년대 한국 수출산업의 선구적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그러나 또한 당시 노동자들의 한숨과 분노가 스며 있었으니
1970년 겨울,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곳도 이 시장 앞이었다.


'가두노점'

 

(1965년, 서울특별시)
복개된 후 청계천로를 찍은 사진으로
중앙에 보이는 가두노점이 인상적이다.
요즘 길가에 보이는 가판대와는 많이 다르지만 크기나
기본적인 모습은 거의 흡사해 보인다.
한편 이곳이 건널목인 듯, 한 사람이 차도로 내딛고 있다.

'최신 건축물, 세운상가'


 

(1968년,
세운상가는 건축가 김수근씨가 최신 건축사조를 끌어들여
만든 최첨단 건물이었다.
설계방식은 60년대 이후 서울이
개발되는 과정을 그대로 상징하는데,
1~4층은 상가로 하되 1층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설정하고
대신 3층을 보행자 전용도로로
건설하는 등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주상복합타운이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획기적인 설계방식이었다.

이 세운상가는 국내
전자산업이 태동할 당시 전자부품이 집결되는 곳으로 70~80년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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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골사모(골프를사랑하는모임)-gftour
글쓴이 : 원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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