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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황제 측천무후 전◈

발란스건강 2016. 1. 6. 12:00

 

 

 

◈여황제 측천무후 전◈

 

서기 62년 측천무후는 지방총독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무조였으며 어릴때부터 말타기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당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었으나 왕자가 황위를 찬탈하는 바람에 먼 지방의 한직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녀는 후처의 자식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아버지의 사망 이후로는...

본처의 오빠들로부터 재산을 빼앗기고 갖은 박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어릴때부터 증오심을 키우며 성장했다.

 

14세 때 아버지의 친구였던 이적 장군이 그를 황궁에 천거하여 그녀는 품계가 높은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빼어난 미녀가 아니었기에 황제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어느날 말을 잘 다루는 그녀를 보고 황제의 셋째 아들인 치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치노는 성격이 내성적이라 보이시한 매력을 발산하는 무조에게 점점 빠져든다.

 

당시 황제는 황태자보다 둘째아들을 더 신임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두 왕자간의 권력다툼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때 후궁의 아들이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자결한다.

나중에 이들의 주모자가 황태자로 밝혀졌고 그 또한 숙청되었다.

 

황제는 왕자들간의 다툼이 반란으로 번지는 것을 염려하여 잔인한 둘째 보다는 온건한 ...

셋째아들 치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이것은 당시의 실력자인 장손무기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장손무기는 황제의 숙부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인물을 선호한 것이다.

 

황태자로 올라선 치노는 부인이 아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후궁이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몇년후 황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러 갔다가 실패한 뒤 병이 들었다.

이때부터 치노와 무조는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황제가 죽고 치노가 즉위하자 비와 후궁들은 모두 절로 보내진다.

무조의 출가를 황제가 반대했지만 황실의 법도는 어길 수 없었다.

 

3년후 치노의 노력으로 무조가 궁궐에 복귀했다.

뜻밖에 황후는 무조를 측근에 두고 경쟁자인 소숙비를 견제했다.

소숙비는 당시 치노에게 가장 사랑받는 애첩이었으나 오만하고 아이를 아직 낳지 않았다는 게 단점이었다.

 

치노는 무조를 가까이 두고자 황제서기로 임명했다.

무조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치노의 권력을 되찾아주려고 노력한다.

환관들을 매수하고 첩자로부터 정보들을 수집하는 한편 중요한 국정현안에 조언을 해주고 지침까지 일러준다.

 

이에 장손무기를 비롯한 신하들은 황제의 변화된 모습에 모두 놀라고 만다.

그리고 누수된 권력을 무조가 하나씩 거둬들여 황제에게 되돌린다.

그 사이 무조는 치노의 사랑을 받아 아들을 낳게 된다.

 

치노는 이를 기뻐하여 그녀에게 따로 궁궐을 지어주고 지방에서 가난하게 사는 ...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장안에 큰 저택을 하사한다.

그리고 과부가 된 언니까지 그 저택으로 오게 한다.

 

무조에 대한 치노의 사랑이 점점 깊어가자 서로를 적대시했던 황후와 소숙비가 마침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녀들이 온갖 음모를 꾸며 그녀를 몰아내려고 하지만 황제 치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 무조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였다.

그녀는 임신 5개월째가 되자 치노와 잠자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고민한 그녀는 언니를 설득하여 그녀를 황제의 침실로 밀어 넣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무조에게 크게 분노하였다.

 

치노는 서른이 넘은 무조의 언니에게도 매력을 느꼈다.

이제 치노는 황후와 소숙비는 물론 다른 후궁들에게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직 두 자매에만 충실하였다.

 

무조는 딸을 출산하였고 치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게 된다.

자신을 후궁으로 천거한 이적을 황실에 등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조에게 강력한 원군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적 대장군의 등장으로 장손무기의 독주는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무조의 주위엔 환관과 궁녀들이 ...

모여들어 충성을 맹세했다.

이제 무조는 황후를 능가하는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갓난아기인 딸이 독살되었다.

시녀들의 증언에 의해 황후가 지목되었고 폐위논의가 시작되었다.

그 사이 무조는 황후의 숙부를 승상에서 파면시켜 그녀의 수족을 잘라냈다.

 

장손무기는 황후 폐위에 적극 반대하였다.

그는 대신들을 조종하여 황실에 상소를 빗발치게 하였다.

이에 무조는 강력한 장손무기를 차마 건들지 못하고 대신 그의 오른팔인 저수량을 파면하였다.

 

그리고 폐비와 소숙비가 무조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폐비는 무조를 향해 예를 올린 뒤 처형됐으나 소숙비는 무조에게 저주를 퍼붓고 처형되었다.

 

이적 대장군은 그 사이 군부를 장악하고 장손무기에 대한 반대 세력을 규합했다.

결국 장손무기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황후는 폐위되었다.

드디어 무조가 서른 나이로 황후에 올라 황실의 중심에 섰다.

그녀는 이때부터 나약한 치노를 대신해 섭정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그녀는 국정을 도맡아 신속하고 과감한 정책들을 펴나갔고 장손무기를 황후와 공모했다는 ....

이유로 유배시킨 뒤 자결케 하였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폐비의 숙부까지 처형하였다.

그녀는 잠재적인 적으로 살아 숨쉬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치노는 무조의 이복 오빠들과 사촌들을 황실에 등용하려 했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녀는...

이들에게 아주 낮은 관직만 허락하였다.

그녀는 어렸을적에 후처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강탈당하고 온갖 설움을 겪었음을 잊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들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와 대신들은 그 내막을 모르고 무조의 외척배제를 극구 칭송하였다.

 

이에 당사자들이 지위가 너무 보잘 것 없다며 불만을 표시하자  그녀는 크게 분노하여 아예 그들의 지위를 박탈해버렸다.

친척들은 그녀의 분노에 몸을 떨어야 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조는 곧이어 세번째 출산을 하였는데 아들이었다.

그 사이 언니와 치노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쾌락에 탐닉하게 되는데 무조는 황제가 다른 궁녀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는 한 이를 묵인하기로 하였다.

 

얼마 후 언니의 딸인 화지가 치노에게 접근했는데 둘이 급속도로 가까워지자 치노를 사랑한 언니는 크게 분노하였다.

이것은 어머니와 딸이 황제를 두고 다투게되는 매우 당혹스런 일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무조는 화지를 치노에게서 떼어내려고 감옥으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치노는 화지를 잊지 못하여 그녀를 황실1품으로 승격시키고 수 많은 별채와 시녀들을 제공하였다.

이에 언니는 더욱 분노하여 황제의 옷자락을 잡고 울부짖기까지 하였으나 황제의 맘을 되돌릴수는 없었다.

언니의 집착에 결국 치노는 그녀에게서 발길을 끊어버렸다.

 

언니는 우울증에 빠져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스스로 출궁하였다.

그리고 아편에 빠져 살다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때부터 무조는 언니를 파멸케 한 화지를 증오하게 되었다.

 

한편 무조에 대한 치노의 사랑은 계속되어 출산이 이어졌다.

이제 그녀는 3남 1녀의 자녀들을 두게 되었고 권력의 암투를 염려하여 화지에게는 출산을 금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지도 아이를 갖고자 했다.

그녀의 간청에 치노황제도 무조를 설득해보려 했으나 번번이 이를 거절당했다.

자존심이 상한 황제가 무조를 외면하기 시작하자 화지와 대신들이 나섰다.

 

그들은 황제위에 군림하려는 무조를 폐위시카자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황제는 비밀리에 이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무조가 깜짝 놀라 맨발로 황제앞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읍소하자...

마음약한 황제가 폐위칙서를 찢어 버렸다.

 

무조는 이때부터 증오의 불길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측근에게 폐위론의 전말을 밝히라는 엄명을 내렸다.

화지와 대신들이 관련자로 드러났고 그 중심에 소숙비의 아들이 있었다.

소숙비는 처형됐지만 그 아들은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무조는 관련자들을 모두 엄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의심 가는 사람까지도 모두 처형하거나 유배시키도록 했다.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화지는 건들지 못했다.

 

치노황제는 점차 국정에 관심을 잃고 무조에게 모든것을 일임한다.

무조는 국정을 위임받아 대사면을 선포하고 사촌들을 귀경시켰다.

사촌들은 너무나 기뻐 한달음에 달려와 술을 선물로 바쳤고 무조는 이를 화지에게 마셔보라고 권했다.

 

화지는 술을 마시자 마자 피를 토하고 쓰러졌고 사촌들은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고 모두 처형되었다.

무조는 이로써 잠재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친척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한편 언니의 마지막 혈육이었던 아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무조의 보살핌에 거만해졌고 호색한으로 변해갔으며 급기야는 황태자의 약혼녀까지 건드렸다.

결국 그도 감옥에 갇힌 뒤 멀리 추방되고 말았다.

 

무조는 조정의 대신들이 갈수록 견제세력을 넓혀가자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혈육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죽였던 사촌들의 자식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조정의 주요관직을 맡게하여 친위세력을 탄탄히 하였다.

 

그리고 개혁정책을 단행하여 서민경제를 활성화시켰고 과거시험을 확대하여 인재등용에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이는 조정에 뿌리박힌 수구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한 권력자에 의해 줄을 서던 대신들의 파벌이 줄어 들었다.

 

무조는 군사적인 전략에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였다.

반란이 잦은곳엔 자치권을 주어 스스로 국경을 방어케하였고 호전적인 타타르족에겐 ......

비밀협정을 맺어 이간질을 시켜 그들의 단합을 막았다.

이로써 제국은 안정된 시대를 열어간다.

 

어느덧 치노가 쇠약해져 황태자 홍이 황제 대리를 맡았다.

홍은 사치와 낭비가 심했고 화려한 여행을 좋아했다.

검소했던 무조는 이를 비난하였고 두 사람은 갈등에 빠졌다.

 

그 해 대기근이 일어나 백성들의 생활이 비참해지자 무조는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고 기거할 사찰까지 정해 놓았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은 지금까지의 태평성대가 모두 그녀의 공이라며 이를 강력히 만류하였고

이제부터는 아예 황제와 똑같은 의자에 앉도록 권유하였다.

이때부터 무조는 새로운 권력 창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조는 이제 공식적인 황제나 다름없는 지위를 얻었다.

그녀는 역모사건으로 고아가 된 완아를 측근으로 삼았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시를 잘 썼으며 총명하였다.

 

무조와 갈등을 벌이던 첫째아들 홍이 병약하여 사망하였다.

이때 황태자로 오르게 될 둘째 선이 반란을 계획했다.

그는 허울뿐인 황태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군주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탄로났고 그는 멀리 유배형에 처해졌다.

 

사실 선의 생모는 무조가 아니라 언니였다.

무조는 둘째를 난산 끝에 사산하였고 황제와 의논끝에 비슷한 날 출산한 언니의 아들과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선은 네 명의 아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

가장 용감했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너무 야심이컸고 거만한 것이 단점이었다.

 

마침내 치노황제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제 황제의 자리는 셋째 아들 현에게 맡겨졌다.

현은 자립심이 강했지만 성급한 성격이 단점이었다.

무조는 이제 태후가 되어 황제의 어버이로 추앙되었다.

 

현이 황제로 즉위하자 조용했던 그의 부인이 도도해졌다.

그녀는 황후에 올라서자 현을 부추겨 권력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현은 황후의 조종을 받고 태후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어느날 자신의 장인을 재상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분노한 태후는 군사들을 보내 현을 체포하고 직위를 박탈했다.

겁에 질린 현은 그녀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태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후의 가족과 그 친척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현과 함께 멀리 귀양을 보내버렸다.

 

이제 황제의 자리는 넷째 아들 단에게 돌아갔다.

단은 선황 치노를 닮아 심약하였기에 황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즉위하게 되었고 전권을 태후에게 일임하였다.

 

이때 유배되었던 둘째 선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곧바로 진압되었고 선은 태후의 명에 의해 자결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7개월 뒤에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심엔 대장군 이적의 손자 서경업이 있었다.

그는 이적의 명예를 더럽힌 부패혐의로 추방된 자였는데 죽은 선과 닮은 사람을 내세워 10만명을 거병시켰다.

그들은 서경업의 엄청난 금전약속을 믿고 몰려든 자들이었다.

 

그들의 위세는 대단하여 삽시간에 양주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주변 지역에 찬탈자를 처벌하자며 동조자를 규합했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이때 승상 배염이 무조에게 섭정에서 물러나길 권했다.

그는 원래 출세하기 힘든 낮은 출신이었으나 태후에 의해 발탁되어 오늘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녀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결국 배염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태후는 30만 대군으로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반란군은 진압군의 위용에 겁을 먹고 혼비백산했고 그들 스스로 서경업의 목을 베어 바쳤다.

 

반란이 진압되자 태후는 배염의 추종자들을 색출했다.

거기엔 의심되는 사람까지 모조리 역모자로 몰아 처형했다.

나중에 배염의 청빈한 삶이 태후에게 보고 되었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태후는 그에게 정중히 제사를 지내주었다.

 

갱년기에 접어든 태후가 의욕을 잃어가자 왕족중의 한 사람이 그녀에게 소보라는 젊은 남자를 바쳤다.

두 사람은 금새 사랑에 빠졌고 태후는 소보에 의해 젊음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보가 시녀 완아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분노한 태후는 두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었고 소문은 금새 퍼졌다.

소보를 죽이기 싫었던 태후는 그를 중이 되게 하였고 소보는 그녀에게 다시금 충성을 맹세했다.

 

소보는 폐쇄된 백마사를 재건하여 묘승이 되었다.

태후와의 관계를 알고 있던 백성들은 소보의 연설을 듣고자 구름같이 몰렸으며 백마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소보는 밤이 되면 궁궐로 들어와 태후와 관계를 맺었다.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고 그는 황실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기묘한 행실에 조정 대신들은 소보를 규탄하기에 이른다.

 

얼마 후 죽은 치노의 동생 월이 왕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역시 왕족들의 반란은 태후의 섭정을 문제 삼은 것이었으나 이 또한 20일 만에 진압되었고 .....

곧바로 연루자 처형이 이어졌다.

여기엔 딸 태평공주의 남편 설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태평공주가 울부짖으며 태후에게 매달렸으나 태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위를 처형시켰다.

태후의 분노는 언제나 피비린내나는 처형으로 귀결되었다.

 

태후의 비호를 받는 소보가 그녀에게 ‘미륵보살’의 칭호를 올렸다.

조카들도 이에 편승했는데, 거기엔 큰 조카 무승사가 있었다.

이어서 낙양 주민들 수만명이 몰려와 태후에게 새 왕조를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조정과 종교계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같이 이를 염원하자 태후는 망설임끝에 아들 단 황제의 의중을 살폈다.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판단한 단이 스스로 황제를 포기하자 태후는 자연스레 새로운 왕조의 황제로 오른다.

  

그녀는 새로운 왕조의 번영을 위해 거대석불과 거대불종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낙산대불은 높이 71미터로 세계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25톤의 무게로 만들어진 거대불종은 측천무후 사후에 해체되고 만다.

 

한편 여제에게는 내준신이라는 측근이 있었다.

그도 출신이 낮은 신분이었지만 여제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에 어떤 역모사건에 연루된적이 있었으나 그녀의 사면조치에 의해 살아 남았다.

 

내준신은 여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는데 오늘날로 치면 정보부 수장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제에게 자신이 모든 피를 손에 묻히겠다고 선언하였다.

 

내준신은 역모를 찾아내 이를 분쇄하고 피바람을 일으켰고 조정에서도 이에 맞서 그를 역모로 맞고발 하였다.

하지만 여제는 내준신을 신뢰하였고 그를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이제 여제는 69세가 되었고 소보는 서른살이 되었다.

소보는 이때부터 애첩에 빠지기 시작하여 여제와 갈등을 빚었다.

소보는 칩거에 들어갔고, 대신들은 이를 빌미로 소보를 비방하였다.

 

소보는 이때부터 백마사를 요새화시키기 시작했다.

무술이 뛰어난 수천의 승려들을 데려와 무장시키고 길거리를 활보하며 다른 종교의 승려와 사찰을 공격하였다.

 

내준신은 소보를 아녀자 납치와 감금, 불법 군대의 양성 그리고 역모기도로 이들을 고발했다.

곧바로 관군이 파견되어 백마사가 포위되었고 승려들은 체포되거나 해산되었다.

 

체포된 소보는 처형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를 동정하고 있던 여제가 그를 특별히 사면해주었다.

소보는 그녀의 안녕을 기원하며 스스로 불속으로 뛰어 들었다.

 

여제가 70세가 되는 해에 넷째 단이 복위음모를 꾸몄다.

여제는 역모와 반란에 지쳤고 단을 너그럽게 용서하였다.

단의 왕비와 애첩들은 여제를 겨냥해서 흑마술을 걸기 시작했다.

분노한 여제는 그녀들 만큼은 용서하지 않고 자결케 하였다.

 

이제 권력다툼은 아들 단과 큰 조카 무승사의 대결로 이어졌다.

무승사의 동생 ‘삼사’는 중립을 지키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딸 태평공주의 문란한 사생활이 여제의 마음을 괴롭혔고 그것이 거대한 음모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내준신이 여제를 찾아와 대규모 역모사건을 보고했다.

아들 단, 현, 월공주, 태평공주, 무승사, 삼사, 근위대까지 포함하여 모든 친인척들이 총망라 된 역모사건이었다. 

여제는 고민에 빠졌고 내준신은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였다.

이 역모를 들추게 되면 여제의 친인척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여제는 더 이상 혈육의 피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했다.

 

그러는 사이 내준신의 밀고에 반격이 가해졌다.

대신들과 왕족들이 한 목소리로 그를 역모로 고발한 것이다.

이에 내준신이 발언권을 요구하자 여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 내준신은 체포되어 처형 당했다.

 

여제는 내준신의 죽음을 남 몰래 슬퍼하였다.

내준신에게 죄가 있다면 자신의 가족을 건드린 것이다.

그녀는 역모를 기도한 친인척들과 화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친인척들이 불만을 가진 것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데 있다.

하지만 여제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 단은 나약했고, 현은 역모자로 유배된 상태이다.

 

그렇다고 조카들을 후계자로 삼자니 사후가 염려되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처형한 여제를 그들이 과연 존중해 줄 것인가?

그 염려가 현실화 된다면 이제까지의 공든탑은 모두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또 하나! 만약 후계자가 정해지고 그 쪽으로 권력이 이동된다면 왕족과 조카중 ...

어느 한 쪽의 운명은 반드시 비참해진다.

여제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였기에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여제가 실의에 빠져있자 태평공주가 두 소년들을 바친다.

이들은 창종과 이지라는 형제로 나이는 각각 16세와 18세였다.

 

여제는 다시 이 소년들과 쾌락에 빠지기 시작했고 국정에 흥미를 잃은 나머지 쫓겨난 현을 후계자로 발표한다.

기대가 무너진 무승사는 의욕을 잃고 지병으로 사망한다.

이로써 아들과 조카들 사이는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무승사의 장남과 황태자의 원자가 싸움을 벌였다.

권력을 취한자와 잃은자의 반목이 극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제는 양측 가족들을 모아 놓고 그 앞에서 두 사람의 자결을 명했다.

가족들은 오열했으며 어머니와 비들은 혼절했다.

 

여제가 79세에 이르자 몸이 더욱 노쇠해졌다.

대신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종과 이지를 부패혐의로 고발했다.

수 많은 증거들이 제시되자 여제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추방했다.

그 슬픔으로 여제는 병이 더욱 악화되어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창종과 이지가 궁궐에 다시 들어와 여제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병세가 나아지자 대신들이 다시 창종과 이지를 역모죄로 고발했다.

여제는 이번에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용서해주었다.

 

다음해 여제의 나이 80세가 되었다.

추운 겨울날 궁궐에 군사들이 칼과 창으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창종과 이지가 그들에게 살해되고 궁궐은 포위되었다.

 

시녀들이 모두 쫓겨나고 텅빈 여제의 궁궐에 무장한 군사들과 황태자 그리고 갑옷을 입은 대신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여제앞에 엎드려 양위를 요청하였다.

 

여제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고 황태자 현을 꾸짖었다.

황태자와 대신들은 아무말도 못하고 모두 물러갔다.

그러나 병사들의 포위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어서 왕족과 대신들의 양위간청이 줄을 이었다.

승상, 조카 삼사, 태평공주까지 모두가 양위를 바라고 있었다.

여제는 장총과 이지에 대해 정중히 장사를 지내준다면 이를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두 사람에 대한 장사가 치러진 뒤, 양위가 이어졌다.

현이 황제로 즉위하고 여제는 더 높은 칭호를 받았으나 이는 빈껍데기일 뿐 모든 권력은 현에게 집중되었다.

 

현은 여제와 다른 충신들의 접촉을 막기 위해 요양이라는 미명으로 여제를 남안의 별궁으로 내보냈다.

완아는 역모를 도운 공로로 현의 품계 높은 후궁이 되었다.

 

백성들은 양위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으로 믿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와 왕족들은 정기적으로  여제에게 문병을 갔고 겉으로나마 쾌유와 장수를 빌었다.

하지만 여제의 별궁은 군사들에 의해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었다.

 

여제가 50년 동안 이뤄놨던 정책들은 현에 의해 하나씩 폐지되었다.

그들은 황실에서 여제의 흔적을 지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현은 황제의 안락함에 빠져 점차 타락해갔다.

 

권위를 잃은 황실에는 권력다툼이 시작되었다.

먼저 승상 장간지와 조카 삼사와의 관계가 험악해졌고 황후는 국정에 관여하는 태평공주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마침내 병권을 움켜 쥔 삼사가 여제를 은밀히 찾았다.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쿠데타를 윤허해 달라는 것이었다.

여제는 더 이상의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며 이를 불허했다.

 

황제 현은 여제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그녀의 충성스런 시녀들과 어의들을 모두 교체했다.

새로 들어온 시녀들과 어의들은 불성실했으며 여제의 병세를 악화시키는 탕약만 바쳤다.

여제는 이를 눈치채고 약을 거부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여제가 사망하자 온 백성들이 슬퍼하였다.

황제 현은 여제에게 올렸던 모든 칭호들을 격하시켰다.

여제의 유언은 치노 옆에 묻히는 것이었으나 이 또한 거부되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완강한 요청에 의해 이 뜻은 실현되었다.

 

여제는 죽기 전에 자신의 비문을 직접 써서 남겼으나 현을 비롯한 왕족들은 이를 반대했고 대신들은 이를 찬성했다.

결국 이 비문에 관한 논란은 오랜 시간동안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이유로 측천무후의 비문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빈 채로 남았다.

 

 

 

◈아름다운 황혼열차◈

-카페지기 석양노을-

출처 : 아름다운황혼열차(黃昏列車)
글쓴이 : 석양 노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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